17-4강 초기 재세례파의 박해와 순교자의 거울
재세례파의 초기 30년은 박해의 역사입니다. 이 강의는 그 실상과, 그것을 기록한 책, 그리고 그 유산을 다룹니다.
이 8분으로 얻는 것
- 재세례파 박해의 법적 근거와 규모를 설명할 수 있다.
- 주요 순교자들과 그 기록을 진술할 수 있다.
- 박해 속에서 형성된 신앙의 성격을 평가할 수 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히브리서 11:37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12:11
법이 된 사형
박해는 무질서한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 처형이었습니다.
법적 근거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로마법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은 도나투스파 논쟁의 유산으로 재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조항이 1천 년 뒤에 되살아났습니다.
둘째, 제국법입니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재세례파를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결의했습니다. 13장 1강에서 본 그 의회입니다. 개신교 제후들이 항의문을 제출한 바로 그 자리에서, 재세례파에 대한 사형 결의가 함께 통과되었습니다.
즉 자기 신앙의 자유를 요구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신앙을 처벌하는 데 동의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규모
정확한 통계는 어렵지만, 연구자들은 16세기에 처형된 재세례파를 2천에서 4천 명 이상으로 추산합니다.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달랐습니다.
- 가톨릭 지역(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네덜란드): 주로 화형. 이단에 대한 전통적 처분입니다.
- 개신교 지역(취리히, 베른): 주로 익사형 또는 참수. 재세례에 대한 조롱 섞인 형벌이었습니다.
특히 티롤과 오스트리아의 박해가 가혹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처형된 이들 가운데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재세례파는 여성도 신앙을 고백하고 증언하도록 했고, 그 결과 여성이 독립된 신앙 주체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순교자의 거울
이 기억은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순교자의 거울(Martyrs Mirror)』**은 1660년 네덜란드의 메노나이트 목사 틸레만 얀스 판 브라흐트가 편찬한 책입니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사도 시대부터 17세기까지의 순교 기록을 모았고, 그중 대부분이 재세례파 순교자입니다. 재판 기록, 옥중 서신, 목격자 증언이 실려 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디르크 빌렘스(Dirk Willems)**입니다.
1569년 네덜란드에서 그는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얼어붙은 연못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굶주려 몸이 가벼웠던 그는 얼음 위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격하던 간수가 얼음이 깨져 물에 빠졌습니다.
디르크 빌렘스는 돌아가서 그를 건져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체포되어 그해 5월 화형당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바람 때문에 불이 제대로 붙지 않아 그의 죽음은 오래 걸렸고, 지켜보던 관리가 형리에게 빨리 끝내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그린 판화가 『순교자의 거울』에 실려 있고, 오늘까지 메노나이트 전통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순교가 만든 신앙
박해는 재세례파 신앙의 성격을 형성했습니다.
첫째, 제자도(Nachfolge)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따름의 끝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문자 그대로 경험했습니다.
둘째, 공동체입니다. 흩어져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집에 모였고, 재산을 나누었으며, 순교자의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셋째, 찬송입니다. 옥중에서 지어진 노래들이 모여 **『아우스분트(Ausbund)』**라는 찬송집이 되었습니다. 1564년에 처음 인쇄된 이 책은 오늘날 아미시 공동체가 여전히 사용하는, 현재까지 사용되는 가장 오래된 개신교 찬송집입니다.
넷째, 이동입니다. 그들은 계속 옮겨 다녔습니다. 스위스에서 모라비아로, 남부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이후에는 프로이센과 러시아로, 마침내 북아메리카로 갔습니다.
또 하나의 갈래 — 후터파
박해를 피해 모라비아(오늘의 체코 동부)로 간 무리 가운데 하나가 특별한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야코프 후터(1500경~1536)**의 지도 아래 이들은 재산의 완전한 공유를 실천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이들이 **후터파(Hutterites)**입니다.
모라비아 귀족들은 이들의 근면과 기술을 높이 사서 한동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후터 자신은 1536년 인스브루크에서 화형당했습니다. 후터파는 이후 여러 차례의 이주 끝에 오늘날 북아메리카에서 공동체 생활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울 것
재세례파 박해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감상적 동정이 아닙니다.
첫째, 개신교의 자기 성찰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이 다른 이의 신앙을 처형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자기가 박해받을 때의 논리를 자기가 박해할 때는 잊는 것 —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둘째, 교회의 에 대한 물음입니다. 국가의 보호가 없어도, 아니 국가가 죽이려 해도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셋째, 따름의 값입니다. 디르크 빌렘스가 추격자를 건져 낸 그 순간은 논문 백 편보다 강하게 복음을 증언합니다.
| 박해의 법적 근거 | 내용 |
|---|---|
|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 재세례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규정 |
| 1529 슈파이어 제국의회 | 재판 없는 사형 결의 |
| 지역별 방식 | 가톨릭 지역은 화형, 개신교 지역은 익사형 |
| 박해가 형성한 것 | 내용 |
|---|---|
| 제자도 | 교리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 |
| 공동체 | 집에서 모이고 나누고 유족을 돌봄 |
| 찬송 | 『아우스분트』 — 오늘까지 사용되는 최고(最古) 개신교 찬송집 |
| 이동 | 모라비아, 네덜란드, 프로이센, 러시아, 북아메리카 |
| 갈래 | 특징 | 오늘 |
|---|---|---|
| 스위스 형제단 | 슐하임 노선 | 메노나이트, 아미시 |
| 후터파 | 재산의 완전한 공유 | 북아메리카 공동체 |
핵심 요약
- 재세례파 박해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결의에 근거한 합법적 처형이었다.
- 개신교 제후들이 자기 신앙의 자유를 항의한 바로 그 의회에서 재세례파 사형이 함께 결의되었다.
- 16세기에 처형된 재세례파는 2천~4천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여성의 비율이 높았다.
- 『순교자의 거울』(1660)이 이 기억을 기록했고, 디르크 빌렘스의 이야기가 그 상징으로 남았다.
- 박해는 제자도, 공동체, 찬송, 이동이라는 재세례파 신앙의 성격을 형성했다.
- 모라비아의 후터파는 재산의 완전한 공유를 실천했고 오늘까지 북아메리카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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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및 토론
- 신앙의 자유를 요구한 사람들이 다른 이의 신앙을 처형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이중성이 있지 않습니까?
- 디르크 빌렘스는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을 건져 냈습니다. 이 행동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국가의 보호 없이도, 박해 아래서도 교회는 존재했습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